2016.02.20
요즘 달력을 자주 본다. 2월이기 때문인가. 겨울이 지겨워서 빨리 이별하고 싶어지는 달이다. 나는 마침 이른 봄방학을 맞이하여 한 달의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다. 재충전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불안과 염려의 시간이 될 수도 있는 아주 묘한 시간이다. 시간이 많아지니 시간이 더 소중해진다. Time is gold. 이 말의 뜻을 깨우치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내가 중년이 되었다는 의미 같다. 돈이 없어서 못하는 일도 많지만, 나이가 드니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일이 더 많았기에, 이 풍족한 시간을 집안일만 하고 끝내기엔 너무 아깝다.
80년대부터 선포하신 설교 말씀들이 타임캡슐처럼 담겨있다. 과거에서 배달된 오늘을 위한 편지들이다. 그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뭘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는다. 한두 편 정도 밑줄 그으며 읽다 보면 형광펜으로 다시 칠하는 구절도 생기고, 멈춰 서 한참을 생각하거나, 때론 그땐 몰랐던 아버지 마음을 깨닫고 이제야 울었다. 1994년 4월호 참평안 권두언을 읽고 있었다.
겨울은 생명이 속으로 영글어가는 시간입니다. 이 진리에 깨어 있어야 봄날 아침 빛 속에 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한참을 생각했다. 겨울이 너무 지겨웠는데. 이 차갑고 민숭민숭한 계절을 두고 생명이 영글어 가는 시간이라고 하셨다. 그 진리를 몰라서 나는 봄이 막막하고 불안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나의 경우, 올해는 일의 마침과 시작점이 모호해지면서 2월이 불안정하게 시작했다. 단단한 반석 위에 서고 싶고, 정확한 위치를 알고 전진하고 싶은데 내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신앙의 나침판을 흔들어 보고, 이게 정확한 지점을 가리키는 걸까 묻고 또 묻는다. 작년에 있던 나의 직장과 교회의 기관이 모두 변하면서 무언가 인생에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새로운 기관, 새로 만나는 사람들(같은 교회에 있지만 처음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새로 시작한 배움, 또 새로운 일터까지. 방향을 틀고 계시고 어딘가로 이끌고 계시는데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인 나는 그 과도기가 긴 겨울처럼 지속되자 점차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 되고 여섯째 날도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낮 시간이 아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오는 밤 시간에 의미를 두신다. 그 캄캄한 밤에 조용히, 신비롭게 내리는 사랑의 밤비처럼 우리 생명이 속으로 영글어가도록 하신다. 이것이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신다. 이 밤 시간이 없으면, 이 겨울이 없으면, 교회가 영적인 골다공증에 시달린다고 하신다. 성도들이 먼저 말씀의 인격으로 성숙되지 못한 채 양적인 성장만 계속할 때의 문제라고 하신다. 늘 낮에만 거하면 자신만의 삶에 안주하게 된다고 하신다.
나에게 이 밤이 온 때는, 이번 겨울이 나를 덮기 시작한 때는, 내가 딱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던 때였다. 이런 안정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 영적인 골다공증이 시작된 시기였나보다. 외적으로 ‘나는 든든하다, 안정되었다.’ 싶을 때 덮친 이 안개가 나를 불안하게 했는데, 그 안개의 정체는 사실 아버지의 사랑의 밤비가 뿌린 골다공증 치료제였나 보다.
겨울이 마냥 계속될 것 같더니, 어느새 사순절. 봄을 준비한다.
소경이 되어 버린 인간의 마음눈을 뜨게 해주려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던 그 혹독한 밤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그분 자신이 바로 사람이 영원한 생명으로 영글어가는 길 자체가 되셨고, 마침내 겨울에 갇힌 우리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봄이 되어 주셨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 무덤이 깨지고 주님이 부활하시는 시간이다. 내 안에도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의 수고로 뿌려 놓으신 구속사 말씀의 씨가 있다. 이 겨울밤 동안 그 생명의 씨앗이 자라 내 안에서 영글어져 가기를 날마다 기도한다. 이 씨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적셔지고 부활의 소망으로 덥혀져서 대지를 뚫고 나올 때까지. 이 마른 작대기 같은 겨울이 끝나는 날, 나의 삶에도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같이 만개한 꽃이 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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