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07
요14:27~28, 골3:1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낙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정입니다. 그런데 인생에게 주신 행복의 낙원인 가정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가정에는 어두움의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고, 이러한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근심'이란 평안이 되지 못하여 속을 태우는 일, 마음이 괴로워 속을 태우는 것입니다. '걱정'이란 일이 잘못되지 않을까 하여 마음을 졸이거나 또는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어쩌나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고, '걱정, 근심, 시름' 모두 어려운 일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걱정'이 가장 포괄적인 뜻을 가져 사소하고 가벼운 고민거리도 포함하는데 반해. '근심'과 '시름'은 보다 심각한 고민상태를 나타낼 때 쓰입니다. 특히 '시름'은 오래된 문제로 말미암은 것으로 사람의 얼굴에 일상적으로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망의 문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요20:19, 21,26). 지난 6월 전세계가 한자리에 모여 월드컵축구경기를 할 때, 한국 선수 중 몇 사람이 출전하기 전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한국 선수들에게 이 대자연 같은 한없는 평안한 마음을 주옵소서"였습니다.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면 공도 제대로 차지 못합니다. 평안해야 만사가 형통하기 때문입니다(빌4:6~7, 골3:15).
평안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한국인의 인사 "평안하십니까?","안녕하십니까"도 평안하기를 원해서 이러한 인사말이 생긴 것 같습니다. 누구나 원하지만 많은 사람이 못 가진 것이 평안입니다. 사람이 요람에 누웠을 때부터 무덤에 누울 때까지 잠시도 잊지 않고 찾는 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사48:21, 57:22).
평안이란 한자는 평평할 평, 평안 안을 써서 마음이 고른 상태를 말합니다. 평안은 마음의 균형입니다. 마음의 균형이 깨어지면 오기, 심술,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기고, 시기가 나고, 부조리한 말, 과격한 행동, 부정적 반응을 나타냅니다. 결국은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요12:17~19, 마27:18, 막15:10).
당황이나 초조도 균형을 잃은 상태입니다. 육신의 병이나 정신의 질환들은 마음의 평안을 상실했을 때 생깁니다. 과식증도 마음의 평안을 잃었을 때 찾아온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계서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요14:27).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 평안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16:33)고, 예수는 자기가 이 세상에 온 목적 중의 하나가 평안을 주는 것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평안의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엡5:15).
우리에게는 왜 평안이 없습니까? 평안의 극치는 갓난아기의 잠자는 얼굴이라는데 그런 평안을 우리는 왜 잃어 버렸습니까?
첫째로 그 범인은 미움입니다.
미움은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성경은 “사람을 말하면서 남을 미워하면 거짓말쟁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요일4:20). 또한 “남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고까지 말합니다(요일3:15).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랑의 주인과 미움의 주인을 동시에 숨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마6:24). 즉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공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눅16:13, 롬6:16, 약4:4).
마음의 평안을 가지려면 미움을 씻어야 합니다. “평안을 주소서”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미움을 없애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투, 불만, 미움이 어떤 계기에 과격한 행위로 표출된 것입니다. 미움을 “남에게 해를 안 끼치는 마음속 문제”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남을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미움”이 ‘살인’이라는 형법 문제로 연계됨을 지적하여 “행동은 마음자세부터 고쳐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요일3:12~15, 마15:16~20, 눅6:45, 엡4:29~32).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를 미워하라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하면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마5:44~45, 갈5:19~21, 계21:8).
둘째로 나에게서 평안을 뺏아가는 것은 육신에 대한 염려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을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마6:25~34). 실제적인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똑같이 육신에 대한 염려로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어 모세를 원망할 때,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출17:1~7).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리이까?(출17:4)" 안타까운 호소였습니다. 모세가 가르치고 또 설교하고 기적을 보여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걱정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않고 줄곧 중얼거리고, 줄곧 마음이 불편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을 이끌고 호렙산으로 가라. 그리고 네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하니 반석에서 생수가 솟았습니다. 그 곳 이름을 ‘맛사’라 명명하였으니 히브리어로 ‘시험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계속 하나님을 시험합니다(출17:5~6). 그것은 불신이며 죄입니다(마4:7, 요16:9, 8:24, 행2:36~37,고전12:3, 민14:20~24, 신9:7, 고전10:9).
경제 문제이든지 질병의 문제이든지 육신이 괴로우면 얼른 하나님의 능력, 사랑, 섭리 같은 것은 말끔히 잊고 걱정하고 염려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사람입니다(민14:22, 23, 27). 사마리아 땅 수가성에 몹시 속이 불편한 한 여자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생수를 그 마음속에서 영원히 솟아나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4:3~42). 여자는 계속 빈정댔습니다. 당신이 두레박도 없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느냐, 이 깊은 우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팠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나은 인물이냐, 유대인 남자가 어찌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거느냐는 등 불만과 열등감 속에 사는 이 여자는 예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계속 육신의 차원에서 목을 축이는 물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생수’는 영혼의 양식이었습니다. 풀과 같은 육신의 문제보다 영혼의 문제를 먼저 다르면 육신의 행복, 마음의 평안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순서였습니다(요4:3~42). 그래서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다”고 요한삼서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시니의 첫 오페라인 ‘세빌랴의 이발사’가 공연되었을 때 관중들은 소리를 질어 모욕적 발언을 할 정도로 화를 냈습니다.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연출가, 가수 등 스태프가 당황하여 로시니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찌감치 집에 돌아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집으로 달려와 그를 깨웠습니다. “지금 잠 잘 때 입니까? 당신의 첫 작품이 혹평을 받고 있는 이 마당에 편히 잠들 수 있습니까?” 로시니가 대답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작곡이 시원찮으면 다음 기회에 더 좋은 곡을 지으면 되잖소? 잘 때는 잘 자고 내일 또 의논합시다.” 물론 이 오페라는 졸작이 아닙니다. 1816년에 작곡된 후 오늘날까지 187년에 걸쳐서 더욱 호평을 받으면 공연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마11:28~29). 육신의 염려, 세상의 걱정, 그것이 커야 얼마나 크고 또 얼마나 오래 갈 것입니까!(마13:18~23) 걱정은 미리 내는 이자와 같습니다. 세상에 이자를 미리 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있지도 않을 일의 걱정을 미리 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시37:5, 55:2,17, 64:1~2, 잠16:3, 벧전5:7). 걱정이란 그네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몸은 계속 움직이나 전진은 없습니다. 손해만 주고 발전에 도움을 안 주는 것이 걱정입니다. 걱정의 시작은 믿음의 끝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시작은 걱정의 끝입니다.
작년 이맘때에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한다면 정상이며 사실 대부분의 걱정은 1년도 못 갑니다. 1년 전의 걱정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걱정이 심각했든지 어리석은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낮에는 너무 바빠 걱정할 틈이 없는 사람과 밤에는 너무 졸려 걱정할 틈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평안을 받을 것입니다.
부산에 구십세 생을 맞은 노파가 있습니다. 무척 고생스러운 일생을 살았는데 구십 세 생일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하는 시간이야 정신없었죠. 걱정할 틈이 있나요? 앉았을 때는 푹 쉬죠. 쉬지 말고 걱정하라는 성경말씀이 없잖아요? 밤이 되면 많은 생각과 걱정이 떠오르는데 자 버리죠. 자는 시간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시간이니까요”(마27:1~2, 18, 20, 막15:1,10, 눅22:66, 행3:14, 요11:47, 12:10~11, 19)
믿음은 평안을 줍니다. 이해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용서의 은혜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주십니다(마22:34~40, 롬12:17~21, 13:8, 10). 내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한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본받아 미움을 버리고 질투와 경쟁심을 버려야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 곁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해 주소서”하고 자기의 죽어가는 육신에 대한 걱정보다 영혼의 장래를 염려하는 믿음을 가져 낙원의 허락을 받은 것처럼(눅23:39~43), 육신의 걱정 울타리를 넘어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때 하늘의 평안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빌4:6~9, 사26:3~4, 골3:15~17, 요14:27).
가정은 온갖 축복의 기관입니다. 가정은 세상에서 인간이 누리는 모든 축복을 받고 나누는 기관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전입니다. 가정은 경건한 자손의 산실입니다(말2:10, 15).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세우신 가정은 경건한 자손을 번식시키는 행복의 산실입니다.
‘경건한 자손’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손 곧 신앙인의 자손을 말합니다. 구원받을 사람을 말합니다. ‘경건한 자손’은 바로 영적 믿음의 아브라함의 자손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경건한 자손’이 있는 가정에는 하나님 경외가 있고, 부모 공경이 있고, 부부 사랑이 있고, 형제 우애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과 용서가 있고, 감사의 찬송과 기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저마다의 달란트가 있고,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선용하는 목적의 일치가 있기 때문에 걱정이나 세상 염려가 틈 탈 시간이 전혀 없습니다. 가정은 하나님 사랑하기를 가르치는 곳입니다(신6:5).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라”는 지식의 근본이 전달되는 거룩한 교육의 장이 가정입니다.
인간의 낙원인 그리스도인의 가정, 우리의 가정이 언제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계승하는 축복의 산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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