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66
등록일

2015.11.29

당신 생각


가을에는 커피가 더 맛있어진다. 따듯한 커피를 마실 때 그 진향 향기도 함께 마시게 되어 커피의 맛을 두 배로 누리는 기분이다. 여름에 마시는 아이스커피는 목과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는 대신 그 향기는 사라진다. 나름 커피 애호가인 나는 오류동에 이사 온 후 집 근처 작은 카페들을 방문하고는 이 집은 아이스커피가 맛있는 집, 이곳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잘 하는 집, 이 집은 혼자 책 보기 좋은 집 등등 나름의 카페 리스트를 정하고 분위기에 맞추어 공평하게 방문하고 있다. 각자 로스팅의 방법도 다르고 원두도 달라서 그 맛이 다양하기에 꼭 어느 것이 최고라고 하나만 선택할 수 없어서이다. 


가장 맛있었던 커피를 생각해봤다. 몇 년 전 사순절 기간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끊어야 한다는 말씀에 나는 커피를 떠올렸고 험난한 40일간의 커피 없는 삶을 살았다. 그 한 잔의 커피가 뭐라고. 카페인이 내 핏속에 혈전처럼 뭉쳐있던 건지 정말 힘든 시간이어서 커피 단식은 그 이후 다시는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한다.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주일에 마신 그 첫 커피의 맛을. 행복한 카페에 앉아서 아메리카노 커피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고는 양손이 뜨거워진 채 드렸던 감사 기도를.  



lak14930.jpg



커피를 앞에 두고 마음이 숙연해질 때도 있다. 나는 주로 생각을 하거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쓸 때 옆에 커피를 둔다. 그런데 구속사 시리즈의 저자가 그 책을 집필하실 때 따뜻한 서재에서 커피를 마시며 쓴 글이 아니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 잊어지지가 않는다. 심폐 허약자인 나로 하여금 지리산 그 장소에 가서 내 눈으로 그 황량한 장소를 목격하게 하시고 나서는 더더욱. 이렇게 쌀쌀한 날, 안개마저 자욱한 날에는 6개월 간 앞도 보이지 않는 긴 겨울을 보내셨을 때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셨을 텐데. 


가을이 짙어가고 커피 향이 진해질수록 자꾸 아브라함이 생각난다. 커피 잔을 뱅글 뱅글 돌리며 아브라함을 찾는다. 그는 참 볼품없는 외양의 원두 같았는데, 그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깊은 맛과 향기를 주고 갔다. 사실 나는 그를 향기로 기억하기보다는 소리, 음성으로 기억한다. 그가 남긴 구속사 시리즈를 읽을 때도 그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성경을 읽을 때도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항상 단에서 설교를 하시기 위해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에도 성경을 넘기고 계셨고, 장장 두 시간이 넘는 말씀을 다 끝내고도, 뒤에서 성경을 계속 찾으시다 다시 마이크 앞으로 나와서 축도 시간에 다시 2차 설교를 하시던 그 모습. 그 중요한 것을 전하실 때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 목소리가 커피 향처럼 나를 감싼다. 


나는 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었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 선생님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 나오세요. 구속사 시리즈를 읽어보세요.'라고 직접 전하지 못해도 그리스도의 향기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간증집에서 읽은 것처럼 '선생님 다니는 교회에 저도 가고 싶어요.'라고 말해주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는지 이젠 알겠다. 내가 먼저 내 기분, 내 취향, 내 시간, 내 공간에 대한 기득권을 모두 원두 가루처럼 부수지 못 했다. 


우리에게는 알게 모르게 각자의 향기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것, 머무는 곳에서 배인 육적인 향기가 있겠고, 우리가 매일 생각하는 것, 듣는 것, 공부하는 것이 배인 영적 향기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영적 향기를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말씀해주신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나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이 가을 좀 더 깨져봐야겠다. 좀 더 부서져야겠다. 내 자아와 고집이 부서지지 않으면 그 향기가 나올 수 없기에. 이 가을 그 산산이 부서짐의 사랑을 먼저 보여준 당신이 너무나 생각난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장 1절-2절)  



9bd8bd8ebeff3194a5823e61d260798e.jpg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46

#46. 3일마다 가스불에 앉기 _ 지근욱 file

1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 차에서 원로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는다. 설교 때마다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몇 가지 비유가 있다. 예전에는 '또 저 말씀하시는구나...' 하며 귓등으로 흘려들었는데, 지금은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아래 말씀은 그중 하나다. "죄...

 
2016-01-16 515
45

#45. 좌충우돌 오류동 정착기 _ 하찬영 file

"쓰레기 봉투가 없네, 마트 좀 다녀올래? 의자 옆에 바지랑 셔츠 다려놓았으니 넥타이랑 챙기고" 그는 그레이 컬러의 수트와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습니다. 마트에 갈 때는 어떤 타이가 어울릴까 잠시 망설이다 결국 그가 가장 아끼는 타이를 집어 듭니다. 시...

 
2016-01-09 693
44

#44. 작심삼일(作心三日) _ 박승현 file

#2016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를 되돌아보며 자책도 하고, 2016년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한다. 교육생들의 다짐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 금연.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최고의 선물. - 王(왕) 복근 만들기. 몸은 40이지만 마음...

 
2016-01-03 585
43

#43. 2015년 성탄에는 주 예수님 누울 자리 마련했습니까? _ 박다애 file

성탄절(聖誕節)=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의 의미. 'X-MAS'라고 쓰는 것은 그리스어의 그리스도(크리스토스) XPIΣTOΣ의 첫 글자를 이용한 방법이다. 프랑스에서는 노...

 
2015-12-26 681
42

#42. 2015년이라는 길의 끝자락에서 _ 김범열 file

새해가 되면 가장 먼저 새로운 달력을 벽에 걸고 희망에 부풀어 오른다. 2015년 새 달력을 벽에 걸고 설레던 것이 불과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올해의 달력도 12월 마지막 한 장 밖에는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보내며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인...

 
2015-12-12 551
41

#41. 먹다 _ 원재웅 file

인류가 먹고사는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기아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의 관심은 '배불리' 먹는 게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잘 먹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었다. 각종 SNS에 올...

 
2015-12-05 500
»

#40. 당신 생각 _ 강명선 file

당신 생각 가을에는 커피가 더 맛있어진다. 따듯한 커피를 마실 때 그 진향 향기도 함께 마시게 되어 커피의 맛을 두 배로 누리는 기분이다. 여름에 마시는 아이스커피는 목과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는 대신 그 향기는 사라진다. 나름 커피 애호가인 나는 오...

 
2015-11-29 532
39

#39. 인생의 한 분기점을 넘는다는 것 _ 맹지애 file

인생에는 몇 가지 큰 분기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예를 들면 수능, 취업, 결혼 등과 같은 중대한 사건들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의 큰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며 비로소 우리는 성장합니...

 
2015-11-22 779
38

#38. 인재의 기준 _ 김태훈 file

"정규직, 주 5일 근무, 4대 보험, 연차휴가" 구직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보았을 채용정보 사이트의 내용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 정도는 일반적인 조건이고 더 괜찮다 싶은 회사는 리스트가 길어진다. 건강검진, 가족보험, 사내 동호회, 회사 ...

 
2015-11-14 509
37

#37. 견디어라, 나의 마음아 _ 홍봉준 file

견디어라, 나의 마음아 골리앗을 무찌르고 하루아침에 이스라엘의 영웅이 된 다윗! 그러나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화려한 주단이 아니라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으나 장인의 핍박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10년간이나 도망자의 신세가 ...

 
2015-11-08 659
36

#36. 바벨 _ 최주영 file

대화를 하다 보면 간혹 상대방이 어떤 의중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느낌으로도 모르겠고, 제스처로도 파악이 안되고, 말로 표현하다 보면 더욱더 아련해집니다. 이는 대화하는 상대방도 매한가지입니다. 아무리 자세히 일러주어도 ...

 
2015-10-31 560
35

#35. 가치 _ 홍미례 file

현세는 그야말로 교환가치의 시대입니다. 내가 소유하거나 내가 관계를 맺으려는 물건 혹은 사람이 얼마만 한 교환가치가 있느냐에 관심이 집중되지요. 가치를 재는 척도가 그만큼 피상적이고 계산적이며 이기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를테면 ...

 
2015-10-24 511
34

#34. D-30! 이제 겨우 남은 30일 _ 송현석 file

한국의 독특한 교육열과 입시문화,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속성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천국 입시의 아주 확실한 샘플이기도 하다. 강사의 입장에서 보면 이를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으니, 이 글을 작성하는 '수능 D-30'의 시점에서 이에 대해 ...

 
2015-10-17 563
33

#33. 15분 만에 요리가 안 나오는 이유 _ 지근욱 file

냉장고를 열고 식재료를 고른 후, 15분 만에 뚝딱!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리를 만드는 프로그램을 요즘 즐겨 본다. 요리를 먹는 스타들은 한입 먹는 순간 신비로운 표정에 '엄지 척'이다. 대부분의 다른 먹방(먹는 방송)과의 차이점이라면 냉장고에 ...

 
2015-10-10 558
32

#32. 한 해의 2/3 분기점을 지나는 천국 가는 나그네길에서 _ 박다애 file

잠잠했던 비염인데 알레르기가 다시 들끓어 올랐다. 가려운 눈을 비비니 열이 나고, 흐르는 콧물을 연신 닦아내느라 코밑이 허는 지경에 이르렀다. 계절이 바뀌거나 기온차가 갑자기 커질 때면 으레 겪는 통과의례 같은 현상이다. 하늘이 높아졌고, 내가 ...

 
2015-10-03 544
31

#31. 카카오톡 잡상 _ 송인호 file

특정 브랜드의 SNS를 콕 집어 이야기하는 것이 좀 부담스럽지만, 카카오톡을 위시한 여러 SNS가 우리 삶에 끼친 영향은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지대하다. 단순한 문자 메시지, 1:1 대화에서 벗어나 일대다의 전달이나 多對多의 회의까지 실시간으로 가능해졌...

 
2015-09-26 614
30

#30. 포기하면 편해 _ 김범열 file

"아저씨, 아직 멀었어요? 저 늦었는데 내비 찍고 가시죠?" "내가 이 동네 지리는 잘 안다니까. 내비 보다 내가 나아요!" 간혹 택시를 타 보면, 멀쩡하게만 잘 달려있는 내비게이션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 기사님들이 있습니다. 운전 경력이 오랜 택시 ...

 
2015-09-18 1163
29

#29. 여름의 당부 _ 강명선 file

녀석을 발견한 것은 교회 에담 식당 앞 주차장 부근이었다. 감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굴러떨어져 있던 그 녀석. 그 작고 앙증맞은 녀석을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발걸음을 멈췄다.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는 그 철...

 
2015-09-06 525
28

#28. 끝이 곧 시작이라는 말 _ 맹지애 file

헵시바에서의 첫 임원생활이 끝났습니다. 부족한 자녀를 불러주시고, 1년 동안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상황과 여건을 허락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하지만 임기가 끝나고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고, ...

 
2015-08-29 633
27

#27. 칭찬과 감사 _ 김태훈 file

이번 달부터 사내 전산망 자유게시판에 '칭찬합시다'라는 방이 새로 개설되었다. 서로 칭찬하는 문화가 정착되면서 회사가 많이 바뀌었다는 성공사례를 들은 한 직원의 제안으로 시작하였는데 심심찮게 칭찬글과 댓글이 달리고 있다. 업무를 잘 처리한...

 
2015-08-22 832
PYUNGKANG NEWS
교회일정표
2024 . 1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찬양 HYMNS OF PRAISE
영상 PYUNGKANG MOVIE
08345 서울시 구로구 오류로 8라길 50 평강제일교회 TEL.02.2625.1441
Copyright ⓒ2001-2015 pyungkang.com. All rights reserved. Pyungkang Cheil Presbyterian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