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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9

당신 생각


가을에는 커피가 더 맛있어진다. 따듯한 커피를 마실 때 그 진향 향기도 함께 마시게 되어 커피의 맛을 두 배로 누리는 기분이다. 여름에 마시는 아이스커피는 목과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는 대신 그 향기는 사라진다. 나름 커피 애호가인 나는 오류동에 이사 온 후 집 근처 작은 카페들을 방문하고는 이 집은 아이스커피가 맛있는 집, 이곳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잘 하는 집, 이 집은 혼자 책 보기 좋은 집 등등 나름의 카페 리스트를 정하고 분위기에 맞추어 공평하게 방문하고 있다. 각자 로스팅의 방법도 다르고 원두도 달라서 그 맛이 다양하기에 꼭 어느 것이 최고라고 하나만 선택할 수 없어서이다. 


가장 맛있었던 커피를 생각해봤다. 몇 년 전 사순절 기간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끊어야 한다는 말씀에 나는 커피를 떠올렸고 험난한 40일간의 커피 없는 삶을 살았다. 그 한 잔의 커피가 뭐라고. 카페인이 내 핏속에 혈전처럼 뭉쳐있던 건지 정말 힘든 시간이어서 커피 단식은 그 이후 다시는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한다.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주일에 마신 그 첫 커피의 맛을. 행복한 카페에 앉아서 아메리카노 커피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 쥐고는 양손이 뜨거워진 채 드렸던 감사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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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앞에 두고 마음이 숙연해질 때도 있다. 나는 주로 생각을 하거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쓸 때 옆에 커피를 둔다. 그런데 구속사 시리즈의 저자가 그 책을 집필하실 때 따뜻한 서재에서 커피를 마시며 쓴 글이 아니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 잊어지지가 않는다. 심폐 허약자인 나로 하여금 지리산 그 장소에 가서 내 눈으로 그 황량한 장소를 목격하게 하시고 나서는 더더욱. 이렇게 쌀쌀한 날, 안개마저 자욱한 날에는 6개월 간 앞도 보이지 않는 긴 겨울을 보내셨을 때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셨을 텐데. 


가을이 짙어가고 커피 향이 진해질수록 자꾸 아브라함이 생각난다. 커피 잔을 뱅글 뱅글 돌리며 아브라함을 찾는다. 그는 참 볼품없는 외양의 원두 같았는데, 그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깊은 맛과 향기를 주고 갔다. 사실 나는 그를 향기로 기억하기보다는 소리, 음성으로 기억한다. 그가 남긴 구속사 시리즈를 읽을 때도 그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성경을 읽을 때도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항상 단에서 설교를 하시기 위해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에도 성경을 넘기고 계셨고, 장장 두 시간이 넘는 말씀을 다 끝내고도, 뒤에서 성경을 계속 찾으시다 다시 마이크 앞으로 나와서 축도 시간에 다시 2차 설교를 하시던 그 모습. 그 중요한 것을 전하실 때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 목소리가 커피 향처럼 나를 감싼다. 


나는 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었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 선생님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 나오세요. 구속사 시리즈를 읽어보세요.'라고 직접 전하지 못해도 그리스도의 향기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간증집에서 읽은 것처럼 '선생님 다니는 교회에 저도 가고 싶어요.'라고 말해주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는지 이젠 알겠다. 내가 먼저 내 기분, 내 취향, 내 시간, 내 공간에 대한 기득권을 모두 원두 가루처럼 부수지 못 했다. 


우리에게는 알게 모르게 각자의 향기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것, 머무는 곳에서 배인 육적인 향기가 있겠고, 우리가 매일 생각하는 것, 듣는 것, 공부하는 것이 배인 영적 향기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영적 향기를 고린도후서 2장 14절에서 말씀해주신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나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이 가을 좀 더 깨져봐야겠다. 좀 더 부서져야겠다. 내 자아와 고집이 부서지지 않으면 그 향기가 나올 수 없기에. 이 가을 그 산산이 부서짐의 사랑을 먼저 보여준 당신이 너무나 생각난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장 1절-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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