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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릴라가 일어났다. 삼손은 누웠다. 드릴라의 손짓을 신호 삼아 불레셋 병사 다섯이 침실로 숨어들었다. 병사 하나가 삼손의 목을 옥죄며 끌어안고, 다른 병사가 그의 팔을 사슬로 묶는 동안, 세번째 병사가 그의 오른쪽 눈을 찌른다. 삼손의 발가락이 독수리 발톱처럼 웅크려졌다. 그의 몸부림이 허공을 더듬는다. 그러나 부질없다. 잘린 머리 카락과 함께 하나님의 영이 떠나갔으니, 그의 괴력은 남의 일이 되었다.

▶ 렘브란트,<삼손과 드릴라>, 1636년, 205X272cm,슈테벨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네번째 병사가 미늘창을 겨누며 경계한다. 검은 창 끝이 그의 사타구니 사이를 파고든다. 사랑에 속아서 드릴라의 품에 들었던 삼손의 아랫도리가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주먹을 움켜쥐며 고통을 가누는 동안 피 묻은 단검이 그의 왼쪽 눈을 마저 후벼 낼 것이다. 빛이 왼쪽에서 들어온다. 드릴라는 가위를 제 손에 들었다. 이것은 성서 기록과 다르다. 드릴라가 왼손에 든 삼손의 머리타래가 빛 속에 흩어진다. 삼손을 눈멀게 했던 아름다운 여인은 불레셋 사람들에게 배신의 전리품을 보이고 은 1100세겔씩을 거둘 것이다. 드릴라의 자세는 두 팔을 진행 방향으로 교차시켜서 내뻗고 두 다리를 크게 벌려 뛰면서 머리를 젖혀 뒤를 돌아보는 '두려움'의 도상이다. 눈먼 여인의 어리석은 맹목을 돌아보는 드릴라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연민이 뒤섞여 있다.

누운 삼손은 '저주받은 영혼'의 자세를 취한다. 대천사 미가엘의 창에 제압당한 마귀가 지옥불에 등을 지지며 몸부림치는 자세를 빌려 왔다. 여색을 탐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외면한 그의 눈이 빛을 영원히 여의었다. 바같에서 비쳐든 빛이 여인들의 침실에서 일어난 참혹한 사건을 조명한다. 빛은 뱀처럼 차가운 혓바닥으로 삼손의 고통을 훑어내린다.

불레셋 병사들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낡은 부르고뉴 냄비 투구를 윤기나게 닦아서 병사들의 머리에 씌운 것은 렘브란트의 골동 취미다. 미늘창을 겨누는 병사는 터기 복식을 걸쳤다. 이 시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성서의 등장인물에게 오리엔트의 현대식 복식을 차려입히기 좋아했다.

18세기에 이 그림을 소유했던 어떤 이는 삼손의 전율스런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그림 가장자리를 잇대어서 넓혔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그림과 보는 이의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 슈테델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에는 그때 잇대어 붙인 부분에다 넓적한 액자틀을 대어서 다시 가려 두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영혼을 지배 한것은 칼뱅교회였다. 루터보다 한 발 더 엄격한 신학적 입장을 고수했던 칼뱅은 사랑과 자비, 관용과 화해의 오랜 덕목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 물러진 교회의 권위와 잊혀진 양속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고통과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전투적 신앙의 자세를 독려했다. 이 시기에 잔혹 주제의 그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네덜란드의 시대 정신을 가감 없이 반영한다.

스페인은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다. 잔인하기로 이름난 알바 백작을 앞세우고 네덜란드에 침탈과 압제를 서슴지 않았다.네덜란드가 일껏 가꾸어 낸 문화와 자유를 돌림병처럼 유린하며 노략질하는 스페인 용병들의 만행이 악명을 떨치던 시기였다.스페인을 두고, 의로운 삼손을 파멸시킨 불레셋에 빗대어 말하는 설교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삼손의 생애를 다섯 점의 연작으로 남겼다. 모두 1628년부터 1641년까지 나온 그림들이다.<눈을 잃은 삼손>은 판관기의 영웅을 가장 참혹하게 재현한 작품이다. 다섯 감곽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시각의 보배로운 은총을 앗기는 순간이다. 시각의 상실은 화가의 가장 큰 두려움이기도 하다. 부친의 실명을 곁에서 지켜보아야했던 렘브란트는 실명의 소재를 예사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빛의 상실과 신앙의 상실을 삼손의 운명에 빗대어 그렸다.

▶ 렘브란트,<삼손과 드릴라>의 부분 그림, 1636년,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 렘브란트,<삼손과 드릴라>의 부분 그림, 1636년,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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