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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5
“하나님, 살려주시면 전도사 되겠습니다.”
제 나이가 어느새 올해 여든 넷입니다(편집자 주 : 현재는 91세). 1926년생이에요. 고향은 이북입니다. 황해도 송화군이죠. 거기서 주일학교를 다녔어요. 처음 교회에 간 건 일곱 살이나 여덟 살 때였을 거예요. 어머니, 언니, 그리고 작은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하셨어요. 저도 따라서 교회에 다니게 됐죠. 특히 저보다 열다섯 살 위인 언니는 목사님들을 말할 수 없이 잘 대접했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니가 저를 교회에 데리고 다녔죠.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인민군이 1·4 후퇴를 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잡아갔어요. 동네 사람들이 피난을 가기 시작했어요. 우리 가족은 오빠가 병이 나서 피난을 못나섰는데 저는 혼자라도 인민군들을 피해 월남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혼자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국군이 주둔한 초도라는 섬으로 가야만 남쪽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어요. 인민군들이 피난민들을 잡으려고 머리 위로 총을 막 탕탕 쏴대더군요. 너무 무서웠죠. 언니가 평소에 저한테 “너는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저를 위해서 기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는 안한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너무 무서워서 그 말이 생각나더라구요. 그래서 “하나님, 저 살려주시면 전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배를 얻어 타고 초도까지 가게 됐어요. 초도의 산에 올라가서 보면 우리 집이 보이거든요. 혹시 가족들이 따라 나오려나 한참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고 친척 동생(주:여관구 평강제일교회 장로)만 오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둘이 배를 타고 목포에 있는 자운도라는 섬으로 가게 됐습니다.
“여 집사님은 전도사가 돼야 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향에서 살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베개에 수를 놓아 팔기도 하고 엿 장수도 해봤어요. 제가 장사에는 관심도 있고 재주도 좀있었어요. 5천원만 있으면 옷감 장사를 해서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5천원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알고 지내던 부잣집에서 돈을 빌리려고 했더니 주위 사람들이 그 집은 깍쟁이라 10원 한 장 빌리기 어려울 거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때그때 저를 도와주시더군요. 찾아가서 “아주머니, 제가 돈을 벌어서 고향에 가야겠는데 옷감 장사를 하려고 하니 5천원만 꿔주시면 안될까요?”했더니 백지에 싸놓은 돈을 갖다 주더라고요. 장사를 하니까 돈이 꽤 벌렸어요. 사람들이 저를 좋게 보고 물건을 많이 팔아줬어요. 제가 성결교회에 다니면서 봉사를 열심히 했어요. 여선교회장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해서 아이들은 저한테 “여 집사 엄마”라고 불렀죠. 타지에서 목사님들 오시면 제 방을 내드려서 묵게 하시곤 했었어요. 그 동네 사람들은 믿는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이고 다 저를 ‘여 집사’라고 불렀죠. 그래서인지 목포 목사님들은 저한테 “여 집사님은 전도사가 돼야 돼”라고들 얘기를 했었어요. 저는 월남할 때 하나님한테 기도해 놓고도 그때는 또 마음이 변해서 “목사님, 저는 돈을 벌어야죠.”라고 대답했었어요.
똥통에 빠지고 전도사가 되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를 장사 못하도록 역사하시더라고요. 한번은 선창가에서 옷감을 사느라고 잠시 눈을 뗐는데 돈 보따리를 통째로 잃어버린 거예요.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렸어요. 딱한 사정을 들은 덕신상회라는 곳에서 물건을 외상으로 주면서 팔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걸로 장사를 하다가 또 돈 궤짝을 잃어버렸어요. 그 다음에는 욕지도라는 섬에 물건을 팔러 갔다가 자고 일어나 재래식 변소에 갔는데 일어나다가 서까래가 이마를 정통으로 때렸어요. 똥통에 빠져서 동네 사람들이 겨우 구해줬죠. 그때는 똥통에 빠지면 독이 올라서 죽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너무 기가 막혀서 제가 “돈 두 번이나 잃어버렸지, 똥통에 빠졌지, 이젠 정말 못 살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기 장로님이라는 분이 저를 찾아오셨더라고요. 스물여덟 살에 장로가 됐는데 참 훌륭한 분이었어요. 그분이 저한테 “여 집사님은 참 미련합니다. 도둑도 하나님이 붙이시는 겁니다. 목사님들이 다 전도사를 하라고 하시는데 왜 말을 안 듣고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와서 전도사를 하세요.”그러더라고요. 내가 “성경도 본 적 없고 옷감이나 팔던 사람이 어떻게 전도사를 합니까”했더니 전도인으로 오라고 하더라구요. 그제서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걸 깨닫고 전도인으로 갔어요. 압해도라는 섬에 있는 목포 중앙성결교회였죠.
“제가 나귀새끼보다 못하지만 환영 받습니다”
전도인이었지만 교회에서는 전도사라고 불렀어요. 성경을 모르니 답답한 일이 많았죠. 처음 갔는데 나와서 인사를 하라고 해요. “하나님, 나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전도사를 해요. 나 안 할래요. 이 사람들한테 뭐라고 말을 하겠습니까?”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태복음 21장을 생각나게 하시는 거에요.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장면이에요. 앞에 나가서 그걸 죽 읽었어요. 그리고는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는데 나귀새끼까지 덩달아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저는 나귀새끼만도 못하지만 여러분들한테 환영을 받습니다.”라고 말했죠. 그때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할 말을생각나게 하셨어요.
그렇게 매일 새벽기도 인도하고, 잠 못 자고 성경 읽으면서 1년쯤 지났는데 저를 교회로 불러온 이기 장로님이 시험을 봐서 신학교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분이 그렇게 해서 전도사님을 많이 키워낸 분이었어요. 떨어질 줄 알았는데 시험에 붙었죠. 서울 아현동에 있는 성결교 계통의 서울신학교였어요. 입학 후에는 장학금을 받아야 하니까 작은 전구를 하나 켜놓고 불빛이 새어 나갈까봐 담요를 덮어놓고 밤새 공부했어요. 그러다 닭 울면 새벽기도 하러 가고요. 그렇게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홍제동에 있는 성결교회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휘선 박윤식 원로목사와의 만남
하루는 신 집사님이라는 분 댁에 심방을 갔는데 그분 시누이가 오더니 “산상 기도를 오래 하신 목사님이 있는데 보통 은혜가 충만한 게 아니다.”라면서 신 집사님한테 가보자고 하는 거예요. 저는 교인 한 명 빼앗길까 봐 “정 그러면 같이 가보자”고 했죠. 갔더니 박윤식 목사님이 계시더군요. 그때 30대의 젊은 목사님이었어요. 저를 보더니 “전도사구만. 성경 몇 번 읽었어?” 그러는 거예요. “몇 번 안 읽었습니다.”했더니 “전도사면 1년에 성경 7-8번은 봐야지. 신구약 성경 가져왔어?” 그러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전도사라고 심방만 다녔지 은혜를 갈망하지 않았어요. 성경도 신약만 가지고 다녔죠. 그랬더니 “전도사는 시장 가서 고무신 살 때 한 짝만 사나? 신구약 성경구절 31,094절이다 짝이 있는데.” 하시면서 성경 어디어디를 찾으라고 하더라고요. 할 수 없이 옆에 있던 이정희 집사님의 성경을 빌려서 찾는데 어느 구절이 어디 있는지 잘찾지를 못했어요. 그랬더니 또 야단을 치더라구요. 속으로 ‘아니, 사람을 무시하나. 나도 신학교 다 졸업했는데...’ 그랬죠.
그런 뒤 며칠 지나 방에서 잠이 깜박 들었어요. 그런데 비몽사몽 간에 높은 산이 나타나고 그 위에 해가 떠오르는 거예요. 얼마나 밝은지 지금 있는 해의 7배쯤되는 것 같아요. 그러더니 해가 지나가면서 뇌성 소리가 들려요. 무서워서 떨고 있는데 어디서 들리는지도 모를 음성이 들리면서 “마가복음 13장 26절에서 27절!” 하는 거에요. 제가 그때 벌떡 일어나서 성경을 찾아봤어요.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하는 구절이에요.
이상하다 싶어서 다시 잠을 자는데 새벽녘에 이번에는 “이사야 55절 6절!”하는 음성이 또 들려요. 일어나서 찾아봤더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하는 구절이에요.다니던 교회 목사님한테 뜻을 물어봤더니 “뼈까지 먹으면 걸립니다.”라고만 하고 대답을 잘 못했어요. 성경을 너무 많이 알려고 할 필요 없다는 거죠. 그래서 박 목사님한테 가서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산은 우리 기독교의 상징이 시온 산이다, 해는 의의 태양 되신 예수님이다, 뇌성 소리는 우레 같은 심판의 말씀이다, 또 구름은 무슨 뜻이다... ’하면서 하나하나 뜻을 가르쳐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박 목사님이 괜찮은 목사님인가보다’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 뒤로 박 목사님에게 가서 성경공부를 계속 했죠. 말씀을 들어보니 너무 훌륭한 목사님인 것 같아서 내가 섬기던 교회 목사님한테 박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를 좀 하자고 했어요. 박 목사님이 오셔서 네 번 집회를 하셨죠. 그때 첫날 설교 제목이 ‘성전 검열’이었고 둘째 날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자’, 셋째 날은 ‘바가지가 되자’, 넷째 날은 ‘우편강도가 되자’였죠. 들을수록 말씀의 권세에 끌리게 되더라고요. 결국은 ‘내가 박 목사님을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니던 교회에 사표를 내고 나오게 됐어요.
“오늘도 걷고 있습니다.”
당장 사표를 내고 나오니 먹고 잘 데도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아직 교회 건물도 없던 때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미국 워싱턴 지교회에 계신 전극화 장로님 집 지하차고에 가마니를 깔고 화로를 놓고 살았어요. 전 장로님 댁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밥을 해서 양은 양재기에다가 퍼서 먹는데 밥이 모자라니까 못으로 양재기에 절반만큼 표시를 해서 그만큼만 먹었죠. 그러면서 제가 신학교 동창인 전도사들을 7명 데려왔어요.다들 말씀을 듣고는 저를 따라 나왔죠. 그래서 함께 전도를 하러 다녔어요. 수중에 10원 짜리 한 장 없던 때예요. 당시 서울 시내 전차 요금이 5전이었어요. 제가 어찌 어찌 해서 5전씩을 구해와서 차비하라고 나눠줬죠. 그러면 나가서 전도하고는 쌀도 받아오고 고춧가루도 얻어오곤 했어요. 전도하러 다니는 게 쉬운 일이아니죠. 그래도 박 목사님은 매일 어떤 사람이 어떻게 전도돼 오나 하고 기대를 하셨어요. 그때 교회에 있었던 분이 전극화 장로님, 김정화 권사님, 이정희 권사님, 이인애 권사님(편집자 주: 참평안 2008년 12월호 인터뷰 게재) 등이에요.
그러다 박 목사님이 전도사 한 명, 집사 한 명 해서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전부 15명을 전국에 전도하라고 내보내셨어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전국으로 나갔죠. 박 목사님은 서울에서 전도하시고요. 목사님이 전도 결과를 너무 궁금해 하니까 엽서에다가 어디서 어떻게 전도를 하고 있고 누구를 만났다는 내용을 적어서 수시로 서울로 부치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오늘도 걷고 있습니다. 오늘도 또 걷고 있습니다.”하고 써서 보냈어요. 15명이 제주도,충청도,경상도를 돌아다니다가 몇 월 몇 일에 이리(현 전북 익산)에서 모이자고 해서 모인 적도 있었죠. 어느 권사님은 전도 나가라고 하니까 “그럼 우리 아이들 밥은 어떡하죠?”그랬더니 박 목사님이 “그럼 밥이나 해주세요.”그래서 전도하러못 나가기도 했어요. 박 목사님이 그때는 무서웠어요. 전국으로 전도하러 다니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3-4년 지나면서 너무 힘이 드니까 그만 두고 나가는 분들도 적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전도사 중에는 3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이범례 전도사님과 저 둘만 남았어요. 그러다가 홍순분 집사님, 이영숙 집사님 등이 들어와서 나중에 전도사로 임명 받아 일하기 시작한 거예요.
“어디서 이런 향수 냄새가 나요?”
전도하러 나가면 막막하죠. 우선 문을 두드리면서 물좀 얻어마시겠다고 말하고는 들어가서 전도를 했어요. ‘어떻게 전도를 하지?’하고 전도만 생각하고 있다보면 꼭 길을 열어 주셨어요. 한번은 서울 어느 미장원 옆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요. ‘라이온스 호텔 사장 집은 김장을 트럭으로 할 정도로 부자인데 그 집 부인이 갑상선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박 목사님한테 “그 집에 전도하러 가고 싶은데 가서 뭐라고 얘기를 할까요?”하고 상의했어요. 그랬더니 “내 아들 집에 간다고 하고 가라”면서 “가서 우리 목사님이 옹달샘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옹달샘 물을 먹고 바르면 낫는다고 해라”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라이온스 호텔(당시 서울 충무로 소재)을 무작정 찾아갔어요. 직원들한테 사모님이 어디 계시냐고 했더니 뒤로 가면 집이 있다고 가르쳐 주더라고요. 가서 사장 부인을 만났어요. “갑상선으로 몸이 아프시다는데 우리 목사님이 옹달샘 하나를 발견했대요. 그걸 마시고 바르기만 하면 낫는대요.”했더니 그분이 금일봉 봉투를 하나 만들어서는 따라 오시더라고요. 성령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고 금방 따라올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죠. 그때가 우리 교회가 대방동에서 70명 정도가 끼어서 앉는 성전에 있을 때에요(편집자 주: 1969년 개척된 대방동 시온산 한돌 교회). 갔더니 박 목사님이 칠판에다가 글씨를 써가면서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 부인이 성경공부를 한참 들으시더라고요. 저는 속으로 ‘언제 옹달샘을 가시려나.’하고 조바심을 내고 있었죠. 그런데 그 부인이 저한테 이러는 거예요. “전도사님, 어디서 이런 향수 냄새가 나요? 이건 세상에 없는 향수 냄새예요.”
그분 집에 가보니 세계에서 유명한 온갖 향수가 다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교회 와서 ‘향수 냄새’를 맡고서는 갑상선이 싹 나은 거예요. 그 뒤로 박 목사님한테 보통 지극하게 한 게 아니었죠.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 가셨어요. 또 한 번은 대전에 전도하러 갔다가 김의방 목사님을 만났어요. 성결교단 목사님이라 제가 잘 아는 분이었죠. “대전에 어떻게 왔느냐?”고 하기에 “전도하러 다닌다.”고 했더니 밥을 사주시더라고요. 제가 만들어서 갖고 다니던 전도지 꾸러미를 보더니 보여달라고 해요. 그래서 보여줬더니 한참 읽다가 무릎을 치면서 “전도사님, 내가 이런 목사님이 나오길 고대했어.”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박 목사님을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주소를 하나 받아놓고는 그만 다니다가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삼각산 기도원에서 집회가 열렸다고 해서 가보니까 김의방 목사님이 강사라고 하는 거예요. 어디 계시냐고 물어봤더니 지금 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거라고 해요. 올라갔더니 김의방 목사님이 묵상하면서 앉아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박윤식 목사님이 지금 산 아래 계시다고 했더니 이분이 맨발 벗고 뛰어 내려오시더라고요. 그 후로 김의방 목사님이 박 목사님을 극진하게 모시고 명절마다 와서 세배를 하곤 했어요. 나중에 미국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성창합판
부산에서도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 김홍옥 권사(편집자 주: 2006년 박윤식 원로목사의 설교 때 성경을 수백번 읽었고 미수(米壽)의 나이에도 안경을 끼지 않는 분으로 소개된 바 있다), 장성순 권사 등이 전도됐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자꾸 입에서 “적기, 적기”하는 말이 나와요. ‘참 이상하다. 적기라는 동네에서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인가?’싶어서 사람들에게 ‘적기라는 동네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저 시골에 적기라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같이 있던 이범례 전도사한테 가보자고 했더니 자기는 오늘 아프니까 쉬겠다고 해요. 그래서 혼자 갔어요. 비가 철철 오는 날이에요. 가보니 온통 배추밭,보리밭에 거름 냄새만 나요. 그래서 남의 처마 밑에 서서 비를 좀 피하고 있는데 저 멀리에 큰 공장 하나가 보이더라고요. 지나가던 사람에게 “저건 무슨 회사예요?”했더니 “성창합판 아녜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부산으로 와서 성창합판 정태성 사장 댁을 찾아간 거에요. 용감하게 벨을 딱 눌렀죠. 사장 부인이 나오더니 뭐하는 사람이냐고 해요. 전도하는 사람인데 비도 오고 해서 좀 쉬어갈 수 있겠냐고 했죠. 응접실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그 집의 사정들을 환하게 보여주시더라고요. 보이는 대로 소리내서 기도를 했죠. 사모님이 허리에 병을 앓고 있는 것도 보였어요. 도도하던 사모님이 기도 소리를 듣더니 어떻게 이렇게 우리 가정 사정을 알고 기도해 주느냐고 깜짝 놀라서 방으로 들어오시라고 하더라고요. 방에 들어가서 성경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고 있는데 마침 큰 며느리가 집에 오겠다고 전화가 왔어요. 사모님이 “우리 큰 며느리처럼 복이 있는 사람이 없다고, 좋은 대학 나오고 남편은 안수집사에다가 아들이 둘이고 그렇게 효부일 수 없다”고 자랑을 해요. 잠시 후 큰며느리가 왔는데 정말 미인이었어요. 시어머니가 “얘야, 이 전도사님이 어떻게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기도를 해주는지 모르겠다. 너 올 때까지 기다렸으니 예배를 드리자”고 해서 예배를 드리고는 성경을 가르쳐 줬어요. 그랬더니 큰 며느리가 “전도사님, 저희 집에 좀가실래요? 저희 큰 아들이 장티푸스를 앓고는 막 나았는데 기도 좀 해 주세요”하더라고요. 그 집이 부산 문현동인데 엄청난 대저택이에요. 성경공부를 해줬더니 “전도사님, 부산에 언제까지 계세요? 계시는 동안에라도 저희 집에 계세요.”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에 1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 큰 며느리가 부산에서 자기 동창들, 인텔리들만 모아놓고는 박윤식 목사님을 초청해서 성경공부를 많이 했어요. 박 목사님이 오셔서 아주 재미있게 말씀을 증거하셨죠. 나중에 우리 교회가 노량진에 있을 때는 그분이 비행기 타고 서울까지 와서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물질로 헌신도 엄청나게 했죠. 한번은 박 목사님 좀 모셔달라고 해서 모셔왔더니 5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놓으면서이걸로 교회를 지으시라고 하는 거에요. 다이아몬드가 시퍼런 게 번쩍번쩍하더라고요. 어디 가서 쉽게 팔기도 어려워서 앞서 얘기한 라이온스 호텔 사장 부인에게 사달라고 했어요. 박 목사님이 2백만 원만 받으라고 해서 2백만 원에 팔았는데 아주 싸게 판 거죠. 그 헌금으로 신림동 일석교회를 지은 거예요. 교회 지을때 성창합판에서 합판도 많이 올라왔어요. (편집자 주: 성창합판은 부산외국어대 설립자이기도 한 고 정태성 장로가 1930년대에 설립한 기업으로 지금은 ‘성창기업’으로 성장한 부산의 지역 기업이다. 성창합판은 1956년부터 부산 적기(赤崎, 현 우암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1%를 깨닫지 못하면
목사 안수를 받은 건 1982년입니다. 그때 미국에서 이재현 목사님과 같이 전도를 많이 했죠. 현지 교회에서 성경공부도 가르치고 우리 교회와 결연도 하면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 후 많은 목사님들이 본 교회에서 미국으로 파송돼 오면서 저는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어요. 그 뒤부터는 교회에서 교구를 맡으면서 목회를 했죠. 살아온 순간순간마다 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역사하셨어요. 오늘까지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많은 분들을 전도했지만 끝까지 남지 못한 분들도 많아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분들도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그렇지만 완전히 깨닫지를 못해서 끝까지 남지 못한 거예요. 박윤식 원로목사님이 늘 그러시죠. 100% 말씀을 받았는데 50%만 깨달으면 나머지 50%는 어둠이라고요. 우리가 99% 신앙을 가졌다 해도 1%가 없으면 안되는 거예요. 하나를 못 깨달으면 그 하나 때문에 걸림이 되는 게 많아져요. 나도 순종 못한 게 참 많아요.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일치돼야 하는데 못 믿은 거죠. 갈수록 많이 생각납니다. ‘아,그때는 내가 못 믿었었구나.’하는 일들이 많아요. 그때 나를 붙들어 주셨으니 지금 내가 있는 거예요. 이제 나부터라도 잘 믿어야죠. 내가 전도한 것도 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인데 한때는 ‘내가 했나?’ 싶을 때도 있었어요. 교만이었죠. 지금은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너무 어리석었어요. 이제는 잘 믿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불순종의 아픈 기억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평강제일교회에서 헌신하면서도 때때로 “내가 믿는 믿음이 진짜인가?”하는 불신이 있었어요. 내가 젊을 때 장사를 해서 그런지 장사와 물질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전도를 하면서도 ‘돈이나 벌어볼까’ 생각한 적도 있죠. 한번은 기도 많이 하고 예언을 하는 분이 있다고 누가 소개해서 찾아간 적도 있어요. 내가 믿는 게 진짜인가 물어보고 싶었어요. 여자 분인데 날 보더니 “전도사님이군요. 전도사님은 돈에 대한 건 상관하지 마세요. 입이 닳도록 말씀만 증거하세요.”그러더라고요. 그런데도 내가 물질에 대한 부분을 순종 못한 적이 많아요. 원로목사님께서 절대보증서거나 돈 빌려주지 말라고 하시잖아요. 그런데도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아는 사람한테 크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죠. 물질 때문에 참 너무 혼이 났어요. 돌이켜 보면 돈에 관심이 있어서 그랬던 거예요. 순종을 못한 결과죠.
박윤식 원로목사와 동역한 한 평생
원로목사님에 얽힌 얘기들이 한 두 개이겠습니까.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아요. 돈 얘기도 그래요. 지방에서 전도 다닐 때 성도들이 헌금으로 드리는 돈은 다 교회로 보냈지만 한번은 1,500원을 모아서 ‘이건 내 교통비로 써야겠다.’고 챙겨놓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원로목사님이 내려오시더니 ‘돈 있냐?’고 하시는 거예요. 없다고 했더니 또 ‘변화를 두고 맹세할 수 있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꿍쳐놓은 것 다 드렸죠. 또 한번은 원로목사님이 오신다고 하기에 돈을 이불 속에 숨겨 놓았어요. 그런데 또 원로목사님이 오셨어요. 누워서 쉬시라고 이불을 까는데 그 돈이 원로목사님 머리 앞에 가서 떨어지는 거예요. 웃으면서 “이 돈이 여기 와서 소리친다.”그러시더라고요. 큰 돈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나한테서 물질에 대한 욕심을 없애려고 그러신 거예요.
너무 사적인 얘기일 수도 있고 너무 신비주의적인 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직접 보고 생생하게 경험한 것이니까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저와 주위 사람들의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원로목사님이 오래 전에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뤄진 게 많아요. 또 한 번은 “앞으로는 우리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너희들이 나를 보고 싶어도 잘 못 만나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속으로 ‘우리 교회가 어느 세월에 사람이 많이 모여서 그렇게 되겠나.’ 했지요. 지금 그렇게 됐잖아요.
내가 생각하는 ‘변화’
평강제일교회는 말씀으로 이뤄진 교회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믿고 순종만 하면 정말로 큰 기적의 역사가 이뤄지고 세계적으로 빛나는 교회가 될 거라고 저는 믿어요.
제가 평생 변화(고린도전서 15:51)를 가르치고 살았어요. 당연히 변화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죠. 그렇지만 저는 변화를 맹목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자기 마음 가운데서부터 이뤄져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나라가 내 마음 속에서 이뤄지지 못하면 변화는 못하는 거죠. 내 마음 보따리가 어떻게 될지 장담을 못하는 거예요. 그때까지 과연 내 마음 보따리가 어떻게 될까 모르겠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건 믿음이거든요. 마음 보따리 고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맞아요. 에녹과 엘리야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변화를 했을까 싶어요. 그래도 조금씩은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조금씩 깨달으니까요. 기도만 해도 그래요. 전에는 내가 기도 안 해도 하나님이 다 아시겠지 했었는데 지금은 일 년 열두 달 빠지지 않고 새벽 제단에 나가서 기도합니다. 내 소원을 간구하고, 불쌍한 사람들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요. 그러니 조금씩 좋아진다는 생각이 들죠. 어떻게 선한 일을 할까 늘 생각합니다.
끝까지 남는 자가 되기 위해
오랜 세월 지켜보니 끝까지 남는 성도는 말씀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성도예요. 한때 믿는다 했지만 끝까지 남지 못하는 사람은 시험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시험을 이기려면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 핵심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거죠. 어느 선까지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예요. 내가 2천년 전 이스라엘에 살았다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을까요. 예수님이 말씀 자체로 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못했잖아요. 자기네들 생각과 달랐거든요. 예수님이 불법자의 동류(同類)가 되고 창기와 세리의 친구가 되시니까 자기 마음에 안 맞는다고 믿지 않은 거예요. 다 말씀대로 움직이신 건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이렇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하고 생각한 거죠. 내 자녀라면 내 행동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시험에 들면 안 돼요. 시험에 떨어지면 끝까지 남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평강 성도들한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어떤 연단이 있어도 참고 인내하면 완전히 승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내 잘못, 내 부족함을 인정해야 돼요. 이제는 저도 ‘내가 괜찮게 살았다’, ‘여 목사님이 일을 많이 해서 교회 부흥의 발판이 됐다’ 이런 말들이 하나도 머리에 안 들어와요. 내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너무 너무 일꾼이 없으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나같은 것을 써주신 거예요. 늘 감사하고 감사함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나가는 거지요.
성전 건축은 천국 건축
우리 교회의 역사는 성전 건축의 역사죠. 저는 성전 건축을 하는 것이 천국의 모형인 것 같아요. 아까 얘기한 김의방 목사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천국을 체험했다고 해요. 천국에 가니 각자의 집이 있더라는 거예요. 다 자기 행한 대로 집을 짓더래요. 또 다른 목사님도 천국과 지옥을 다 보고 오셨다는 분이 있죠. 그분얘기도 천국에는 아주 예쁜 집도 있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집도 있더라는 거예요. 저는 원로목사님이 성도들에게 하늘의 상급을 맛보게 하려고 일을 벌이신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도 말씀하시지만 저는 자녀들만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믿어요. 천국에서 자기 일한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에 일을 벌이시는 거죠.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하하. 일편단심이죠. 똑같이! 복음 전도하고 전도 생각만 할거예요. 그때는 혈기방장(血氣方壯)했지만 지금은 육신도 말을 안 듣고 늙었어요. 그렇지만 내 생명 다할 때까지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예전에 같이 전도 다녔지만 지금은 안 나오는 사람들 찾아 다닙니다. 가서 기도도 해주고 권면을 해요. 초창기에 같이 있던 신학교 동창생들도 찾아가서 구속사 시리즈 책을 주면서 다시 나오라고 얘기했어요. 내가 다른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나태하게 집에 있을 게 아니라 성경 공부하겠다는 사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아는 데까지 증거해 주고 밖에 나가서 복음을 가르쳐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야죠.
“내가 선한 싸움을 마치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여운초 목사에게는 아직 해당되지 않는 듯했다. 91세의 노(老)전도자에게는 아직 달려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앙 역정을 들으면서 1세대의 힘겨웠던 수고를 새삼 생각했고, 2세대들이 갈 길도 본질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변화의 반열에 함께 서길 기도한다.
참평안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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