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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1.11.01
깊은 주름 가득한 얼굴에, 험악한 검은색 백골(白骨) 모자. 영 어색하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지곤 하는 게 조화와 부조화를 오간다. 구순(九旬)의 나이에 독(獨)사진이면, 필경은 영정(影幀)을 떠올리기 마련. 허나 숱한 사선(死線)을 넘어온 역전의 용사들에게는 다를 수 있다. 동년배가 겪었을 비애와 세월의 무게 이상의 무언가가 황혼의 기운을 압도한다. 헌신에 대한 자부심일까. 담담하면서도 읽어내기 어려운 복잡한 인상에 일단의 의지가 엿보인다. 마음 깊은 곳 자리한 의무감은 사라지지 않은 듯, 백골과 어울려 불사(不死)의 강인함마저 느끼게 해준다. 사진은 아름다운 표정을 찾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담긴 역사를 좇은 듯하다.
18연대 용사들의 등 뒤로는 바로 북녘땅이다. 지척에 금강산(金剛山) 자락이 보이고 구선봉 또는 낙타봉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선명하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의 배경으로 알려진 ‘감호’와 삼일포의 해금강(海金剛)이 눈에 들어온다. 풍광은 수려하나, 현실은 냉엄하다. 멀리 국지봉에는 북한군 레이더 기지가 있고, 단단한 바위 곳곳을 파고 들어간 북한군 초소들이 즐비하다. “되찾아야 할 땅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사진작가 현효제(라미 현) 씨는 말했다.
38선 이북에 위치한 이 땅을 처음 되찾은 건 바로 18연대 용사들이었다. 71년 전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고 북상했던 국군은 38선에서 며칠을 멈춰서 있었다. 전쟁 이전의 분계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유엔군 사령부의 지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독자적으로 진격 명령을 내렸고, 1950년 10월 1일 양양에서 38선을 최초로 돌파했던 게 3사단 18연대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의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은 다시 이 땅을 빼앗겼다.
그곳을 기어이 재탈환한 것도 그들이었다. 개국 이래 최악의 전투였다는 1951년 5월 ‘현리전투’에서 희생을 최소화하고 현장을 빠져나온 18연대는 빠르게 한계령에 잠입해 오색천 주변에 진 치고 또 다른 기습을 노리던 6만 중공군에 치욕의 패배를 안긴다. 이어 곧바로 양양을 거쳐 김일성의 별장이 있었던 화진포로 진격해 오늘날의 동부 해안 전선을 만들었다. 18연대는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찾아오겠다고 수색부대를 중심으로 고성, 원산, 내금강 일대까지 진출하며 위험한 작전을 펼쳤으나 휴전협정이 진행되며 지금의 휴전선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 현장마다에 ‘군인 박윤식’이 있었고, 그는 금강산 주변 작전 중 대퇴부 관통상을 입고 사흘을 버틴 끝에 구조돼 후송됐고 이후 군을 떠나 목회에 헌신했다(2010년 10월호 참조). 소천 몇 해 전 ‘그때 그 길’을 다시 찾은 박윤식 원로목사는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북녘 땅을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고 당시 동행했던 이들은 전했다.
금강산을 뒤로 그 자리에 서기에, 이보다 합당한 누군가를 찾을 수 있을까. 그 젊은 날 “백골(白骨)이 되어서라도”를 외치고, 되뇌며 숱한 생사의 전장을 함께 했던 그 많던 백골부대 용사들이 70년 세월이 흘러 여남은 이만 남아 그곳에 섰다. 마침 눈부시도록 맑고 푸른 그곳 하늘과 바다가 검은 모자의 백골(白骨)과 비장하게 대비된다. 그 모든 것을 담은 구순 용사들의 표정들은, 그래서 뭐라 형언할 길이 없다.
용사들은 「오색 여호와이레 수양관」을 들러 지난해처럼 기념예배를 드렸고 이어 메달 수여식과 사진 전달식 등이 이어졌다. 권영해 전 국방장관은 이번 행사에 백골부대 용사 가운데 행사에 새로 참가한 9명에 메달을 수여 했는데, 애초 그에게는 4개의 메달뿐이었다고 한다. 휴전선 철조망을 녹여 만든 귀한 메달로, 신규 제작이 불가능한 상황인지라 고민 끝에 문득 수년 전 터키 6·25 참전 용사들에게 전달하려다 코로나 19 때문에 남겨둔 메달이 떠올랐고, 관계자를 통해 딱 5개 남은 메달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병상에 누워 연락 두절 상태에 있던 이 관계자는 연결됐을 때가 막 회복한 직후였다고 한다. 권 전 장관은 “이 행사를 하나님의 준비하셨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금방울자매 특송, 가수 루비의 무대 등 여흥도 뒤따랐고, 용사들은 “귀하고 정성스러운 음식에 극진한 대접을 받고 돌아간다”고 감사했다. 구순의 용사들이 ‘그때 그 길’을 다시 갈 수 있었던 데에는 관할 ◦군단과 ◦◦사단 관계자들의 큰 배려와 도움이 있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6·25 참전 용사들의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프로젝트 솔져」로 이미 유명해진 라미 현 작가는 “교회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했다. 부산에서 전시회를 준비하던 그는 행사를 위해 왕복 12시간이 넘는 운전에, 온종일 사진 작업, 휴게소에서의 쪽잠까지 당일 만 24시간을 강행군했다. “사진은, 액자로 전달될 때 완성된다고 생각한다”는 라미 작가는 한 분 한 분 독사진 액자를 직접 전달했다.
‘헌신에 대한 헌정’이었고, 자부심에 대한 기록의 현장이었다.
참평안(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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