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16
아브라함이 팔을 높이 쳐들었다. 허리춤에 꽂아 두었던 칼을 오른손으로 뽑아 들었다. 예리한 칼이 섬광을 뿌리면 아들의 모가지가 흙더미 위에 뒹굴 것이다.
이순간 천사가 가파르게 날아와서 아브라함의 팔목을 잡아챈다. 성서에는 천사가 아브라함의 행동을 물리적으로 저지했다는 기록이 없다. 베로네세는 말씀만 전하는 천사의 소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화가는 그림의 재현 시점을 낮추어 잡았다. 화가가 정해 둔 대로 보는 이의 시점도 낮은 데서 머리를 젖히고 위를 올려다본다. 이사악이 고개를 들면 그의 눈 높이 정도와 마주할 것이다. 이사악은 옷을 벗고 장작더미에 올라가있다. 아브라함의 펄럭이는 붉은 옷은 어린 제물이 쏟을 피의 예감이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에 천사가 나타났다.
동방 전통에서 아들의 목에 칼날을 대는 아브라함의 위협적 자세가 우세했다면, 라틴전통에서는 팔을 들어 칼날을 크게 휘두르는 '과시적'동작을 선호했다. 온유를 통한 심리적 긴박감보다는 거침없는 직설법의 서술체가 인기를 끌었다. 베로네세는 라틴 전통을 따른다. 그러나 제물의 옷을 완전히 벗기지 않은것을 보면 동방전통을 깡끄리 무시하지는 않았다.
왼쪽 덤불에 어린양이 웅크렸다. 숫양의 대역이다. 2세기 사르데스의 주교 멜리토는 '이사악의 희생' 주제에서 숫양을 예수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인간의 죄를 대속한다는 점이 똑같기 때문이다.
화가가 숫양 대신 어린양을 끌어다 놓은 것은 성서의 유비적 의미를 뚜렷이 드러내려는 계획의 일단이다. 어린양을 가둔 덤불은 예수가 달린 십자가요, 제단이 차려진 곳은 예루살람의 다른 이름이다. 오리게네스는 숫양과 더불어 이사악을 예수의 예형으로 해석한다. 이사악이 제단에 불을 지필 나뭇짐을 진 것을 두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신 일과 비교했다. 이레네우스는 한 술 더 떠서 아브라함을 하나님과 비교한다.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자식을 제물로 삼았던 점이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사악은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묶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사악의 자세와 표정은 경건한 확신으로 넘친다. 위험을 피해서 달아나거나 저항하지 않고 순종과 기도의 자세를 취하는 이사악의 도상은 동방 전통에서 유래한다. 베로네세는 이사악의 어깨 위에 밝은 빛어림을 띄워 두었다. 사실 아브라함, 또는 하나님이 드리우는 부성의 그림자가 아니었더라면 순종의 덕목에 빛나는 그의 어린 어깨가 이처럼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 베로네세,<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1585년 무렵, 129x95cm, 프라도 박물관,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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