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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8

1608년까지 이탈리아 머물던 루벤스가 안트베르펜으로 귀향했다. 곧 돌아가리라고 만토바 궁정에 편지를 띄웠지만 그의 기대는 무산되었다. 이듬해 이사벨라 브란트와의 혼인이 루벤스의 발목을 붙들었다. 그후 그의 역할은 북구의 예술적 토양에 이탈리아와 고대의 빛나는 미술을 이식하는 일에 한정되었다.


안트베르펜 예수회의 주문을 받아서 제단화로 그려진<수태고지>는 윗부분이 깡총하게 짧은 느낌을 준다. 그러니 실물대의 두배 가까이 부풀려진 어마어마한 작품 규격은 이탈리아 바로크의 영향을 받았다. 북구에서 이만한 그림에 이만한 인물들이 등장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지상과 천상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고 어울려 있다.


성령과 아기천사들은 주변소재의 임무를 뛰어넘지 못한다. 화가는 처녀의 어두운 내실에 촛불을 켜 두었다. 마리아가 앉은 뒤쪽으로 붉은 휘장이 큰 주름을 접으며 늘어져 있고, 푸르스름한 융단을 씌운 침소가 보인다. 이곳은 처녀의 침실이다. 탁자 위에 기도서를 펼쳐두고 읽던 마리아가 천사를 반갑게 맞이 한다.


천사가 오른쪽에서 등장한다. 이례적인 일이다. 줄거리의 시간적 흐름에 역행하는 등장인물의 공간 배치는 천사의 '갑작스런 출현'을 뒷받침하는 구성의 파격으로 읽어야 한다. 천사의 붉은 겉옷이 은빛 날개를 휩싸고 서걱댄다. 금빛 머리카락이 천사의 흰 목덜미를 스치며 애무한다. 이런 촉지적 자극은 루벤스 특유의 감성이다. 보는 이의 시점은 천사의 발치에 머물렀다.

촛불이 기울고 성령의 광휘가 처녀의 침소를 비춘다. 마리아의 은빛 속옷과 파란 겉옷, 천사의 파란 속옷과 금빛 겉옷은  아귈로니우스 색채론의 위계를 따랐다. 천사와 마리아가 마주 앉았다. 둘의 긴박한 대면을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했던 화가는 드물었다. 화가의 붓에 이끌려 보는 이도 처녀의 침소에 숨어들었다. 천사와 마리아의 시선이 만났다. 둘이 교환하는 대화에 이처럼 설득력 있는 눈빛의 표정을 담은 화가도 드물었다. 천사와 마리아의 오른손과 왼손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제각기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흉중을 파악한다. 루벤스는 백합과 물병을 치워버렸다. 거추장스런 후광도 걷어 냈다. 다만 꿈틀대는 붓을 녹여서 눈빛과 손짓으로 나누는 무언의 대화를 빚어 내었다.

▶ 페터 파울 루벤스,<수태고지>,1608-1609년무렵, 224x200cm,미술사 박물관,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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