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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8

이들은 누구일까?

세 사람이 길에 모여 있다. 이들 셋은 외모의 특징이 예사롭지 않다. 청년과 장년과 노년이 제각기 현대 복식과 오리엔트풍의 이국적 의습 그리고 고대풍의 복고 의상을 걸쳤다. 시선의 방향도 제각각이다. 올려다보거나 정면을 보거나 내려다 보는 시선들은 무슨 뜻일까? 1500년 무렵 베네치아 미술에서 시선두기는 그림 읽기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단순히 인물과 대상, 인물과 인물사이의 구성적. 심리적 상관성을 매개하는 의미론적 차원을 넘어서 서로 다른 시간성으로 해석되는 일이 자주 있다.

▶ 조르조네,<세 철학자>의 부분 그림, 1508년, 미술사 박물관,빈

올려다보는 청년의 시선이 미래를 예시한다면, 정면을 응시하는 장년은 현재를 대변하고, 눈을 아래로 내리깐 노년은 과거를 돌이킨다. 노인은 멀리 보는 눈을 가졌다. 양미간을 좁히고 눈썹을 아래로 내리뜬 표정은 그들의 여정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어떤 지향에 닿아 있다. 세 사내가 위치한 곳은 거친 암벽이 골간을 드러내고 있는 험준한 지형이다. 이들의 여정이 단순한 산행이 아니라 신성한 의무의 수행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암반이 형성하는 층계를 세 단으로 구성하고 청년과 장년과 노년을 계단마다 차례로 올려놓은 것은 시공간적 층위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종교적 위계를 드러낸다.

대신해서 고대의 과학을 수용하고 다시 근대 유럽에 이식한 사라센 문화를 나타낸다. 고대와 사라센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처럼 상대를 마주보고 서로 짝이 맞는 콘트라포스토의 자세를 취한다. 고대는 자신의 과학을 소유했으나 사라센은 손이 비었다. 왼손을 내밀어서 고대가 건네는 유산을 전수하려는 손짓이 보인다. 청년은 아직 일어나지 못한다. 등에 걸머진 옛 유산의 무게가 녹록하지 않다.

세 사내가 인생의 세 단계를 점유하듯이 배경 숲의 풍경도 그러하다. 노인의 뒤에서는 하늘을 가득히 채우는 거대한 수목들이 파란 잎사귀를 빛내고 있다. 고대의 은성했던 문화와 과학의 결실들은 조르조네가 붓을 들었던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마르지 않았다. 사라센 뒤쪽에는 둥치 굵은 나무가 나뭇잎을 모두 떨구었다. 오리엔트의 토양에 이식된 나무는 새 잎을 피워 올릴 기력을 잃었다. 돌 바닥에 앉은 청년의 시선은 가느다란 나뭇가지와 새순이 피어나는 어린 나뭇잎에 닿았다. 되비치는 햇살을 받고 황금가지처럼 빛난다.

햇무리에 붉은 기운이 씻겨나갔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참이다. 밤과 더불어 어둠의 길을 밝히던 별빛은 사라지고, 아침 새의 지저귐이 요란한 시각, 잠이 없는 노인이 이른 행장을 채비했다. 노인은 두 팔을 상하로 벌려서 품에 간직했던 그림을 펼쳐보인다. 왼손에 쥔 것은 한뼘 길이가 넘는 컴퍼스. 도구를 사용해서 그린 둥근 도형과 글씨를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컴퍼스의 의미는 정확하지 않다. 천문학, 점성학, 기하학, 수학, 건축술, 항해술, 비례론 등 어떤 의미로도 읽힐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미지의 자연을 답사하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창의로 보는 것이좋겠다.

과학의 도구는 자연의 무질서를 꿰뚫어본다. 감관의 도구로는 식별할 수 없는 방위와 절기, 공간의 깊이와 높이에 관한 비례를 과학은 한치 오차 없이 측정해 낸다. 돌 바닥에 주저앉은 젊은이도 컴퍼스를 들고 있다. 청년은 컴퍼스의 둥근 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단단히 잡고 정면을 응시한다. 왼손에 쥔 곡자의 눈금에 견주어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측정한다.

▶ 조르조네,<세 철학자>, 1508년, 123.5cmx144.5cm,미술사 박물관, 빈

조르조네가 그림을 완성했을 때 화면은 현재보다 왼쪽이 더 길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림의 잘려 나간 부분에 '특히 아름답게 그려진 동굴'이 있었다고 한다. 동굴은 '루쿨라 녹티스', 곧 아기 예수의 탄생에 관한 신비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림의 주제는<세 철학자>가 아니라,<길을 나선 동방박사>로 바꾸어 불러야 옳다. 아침이 밝았다. 밤새 동방의 세 나그네를 이끌던 별빛이 침묵하는 시간이다. 신성의 의지에 기대어 길을 갈구하던 이들은 방향을 잃었다. 멈추어 선 이들에게 그림왼쪽에서 새로운 빛이 비쳐든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으로 창조한 빛, 과학의 빛이다.

조르조네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길을 나선 동방박사들의 손에 과학의 도구를 지참시켰다. 이전에 없었던 일이다. 별빛의 신성한 인도와 인간의 자랑스런 도구가 밤과 낮의 여정을 보완한다. 인간의 창조 행위는 지금껏 저편에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졌던 신적 은총에 만족하지 않고 이편에서 능동적으로 마주 서는 인간의 노력에 응당한 가치를 둔다.

이런 사고는 르네상스 적이다. 구원주의 탄생지에 이르기 위해 별의 계시와 과학의 인도가 모두 소용된다. 인간의 몫을 찾아서 인문의 예술로 가꾸는 일이 동방박사의 여정을 빌려서 그려졌다.

▶ 조르조네,<세 철학자>의 부분 그림, 1508년, 미술사 박물관,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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