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16
5월은 일 년 중 ‘기념일’이 가장 많은 달이다. 어린이로부터 시작해서 부모와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사람의 성장과 가르침에 관련된 날들이다. 그중에서 스승의 날은 그 의미와 가치가 많이 퇴색했지만, 그래도 스승은 변치 않는 우리 삶의 중심이요 사회의 기둥임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만일 선생님의 가르침이 없다면 오늘날의 ‘나’나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사회의 열매는 결코 없었을 테니까.
공자의 제자 안연은 자기의 스승인 공자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느꼈다.
“선생님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아만 가고 뚫고 들어갈수록 더욱 단단해 보인다. 바라보니 어느 틈에 앞에서 손짓하더니 문득 뒤에서 채찍질하시네. 선생님은 차근차근 배우는 사람을 이끌어가는구나”
점점 더 높아져가고 더욱 단단해지는 존재! 이어서 안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 나의 모든 재주를 다 쏟아부었지만 나의 눈앞에 우뚝 서 계시는 듯하다. 또 힘을 내서 따라가고자 하지만 어찌해볼 길이 보이지 않네” 제자가 어릴 때는 ‘앞에서’ 손짓하며 따라오라고 본을 보이시고, 어느 정도 지식의 터전을 닦은 후에는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다가 잘못된 길로 빠질 때는 채찍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 스승이다.
스승을 뜻하는 히브리어 ‘야라’는 본래 “물과 같이 흐르다”, “겨누다, 가리키다”라는 뜻이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진리는 스승을 통해 학생에게 물이 흐르듯 전수되는 것이다. 또한 궁수가 화살을 쏘기 위해 과녁을 겨누는 것과 같이 학문의 목표,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주고 인도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무리 탁월한 자라 할지라도 부모의 양육과 스승의 가르침 없이 홀로 자라갈 수가 없다.
그럼에도 스승의 은택을 망각하고 간혹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잊은 듯’ 스스로 앞서가려는 제자들이 있다. 이제 이만하면 나도 스승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자만심의 발로다. 하지만 그러한 자만은 반드시 실패의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고은 시인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 했던 그 꽃”이란 짧은 시처럼 사람은 잘 나갈 때는 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실패하고 내려올 때에야 꽃이 자신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 꽃은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있고, 경쟁자일 수도 있다. 혹은 시장에서 호객하는 장사꾼이나, 효조(孝鳥)로 알려진 까마귀 한 마리이기도 하다. 안타까운 것은, 아픔을 겪고서야 스승의 가르침이 떠오르게 되는 부족한 제자의 모습을 고은 시인의 ‘꽃’에서도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제자를 가리켜 ‘뒤에서 스승의 말소리를 듣는 자’로 표현하였다(사 30:21).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고 일러 주시는 스승의 말소리는 왜 ‘뒤에서’ 들리는 걸까? 긍정적으로 보면, 뒤에서 제자의 모습을 지켜보다 중요한 순간에 개입하여 권면해 주시는 사랑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어느 순간 제자가 스승을 밀치고 앞서 나가버릴 때 스승은 자연스레 뒤로 밀려나고 만다. ‘뒤에서’라는 공간적인 표현은 이런 씁쓸함이 묻어 있다. 시간적으로는 어떤 일을 그르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과거 스승의 가르침이 떠오르는 것을 지적해 주는 표현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그렇게도 듣기 싫었지만, 내가 커서 부모가 되면 자식의 모습 속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어렸을 때 늘 듣던 부모님의 말소리를 뒤늦게 떠올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면서도 ‘스승’은 숨기지 않으셨다(사 30:20). 환난과 고생이 없는 풍요와 평안보다 스승이 없는 상황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임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다. 우리의 삶에 아무리 큰 환난과 고생이 주어진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스승이 되어 ‘정로’(正路)를 일러 주시면 이를 능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승의 헌신과 가치를 단테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당신은 등불을 뒤로 들어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현명하게 만드는,
어둠 속의 외로운 여행자이셨지요” (연옥편, 22곡 67-69행)
제자를 위해 진리의 등불을 뒤로 비추어 주시는 스승의 배려와 사랑.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러한 스승의 사랑과 가르침 덕이다. 제자들에게는 사랑과 진리의 등불을 환히 비춰주시고, 홀로 캄캄한 십자가 무덤 속을 외로이 여행하신 예수님에게서 참 스승의 모습을 본다.
예기(禮記) 학기(學記) 편에 ‘교학상장’(敎學相長)이란 말이 나온다. 직역하면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일이 서로 돕는다”라는 뜻으로 “배운 연후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연후에야 어려움을 알게 된다”라는 통찰에서 나온 교훈이다. 성경에서도 ‘배우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라마드’는 강조형(피엘형)으로 쓰이면 모음이 ‘리메드’로 바뀌면서 뜻도 ‘가르치다’로 변형된다. 즉,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하나의 지적 성장과정에 상호작용을 한다고 본 것이다. 교학상장의 원리이다.
우리에게 참된 ‘선생님’(마 19:15, 막 9:38)이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귓전에서 들리고 있지는 않는가? 선생님을 내 인생의 앞에 모시는 것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스승이 가리키는 ‘정로’(正路)를 행하는 것, 교학상장의 이치를 깨닫고 가르침으로써 배우고, 배움으로써 더 성숙하게 가르치는 길이 뒷전에 있던 스승을 앞에 모시는 방법이다. 큰 스승을 떠나보내고 나니 역시 ‘뒤에서’ 들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눈물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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