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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0.12.29
“나와 같이 일하자” 그 한 마디에…
‘42년 목회 은퇴’ 안갈렙 목사
1978년 우리 교회로의 첫걸음 이후 서울(1980년~)을 시작으로 대전(1984년~), 미국 뉴욕(1990년~), 미국 산호세(새너제이)(1998년), 캐나다 토론토(1999년~), 미국 워싱턴DC(2003년~)를 거쳐 목포(2010년~)까지. 1980년 5월 17일 목사 안수 이래 숨 가쁘게 달려온 안갈렙(안도경) 목사의 이력이다. 42년간 7개 교회를 섬기고, 목포 늘소망교회에서 12월 13일(주일) 은퇴예배를 드렸다. 인터뷰는 은퇴를 몇 주 앞둔 시점에 이뤄졌다.
소회가 어떠하신가요.
‘은퇴’라는 걸 생각해 본 적 없이 지내오다 은퇴를 맞았지만 목포에서 마무리하게 되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원로목사님(휘선 박윤식 목사)이 ‘제2의 고향’이라고 선포하셨던 곳이고, 개인적으로는 7번째 시무하는 교회이고요.
왜 제2의 고향이라고 하셨을까요?
지리산에서 3년 6개월 7일 기도를 마치신 뒤 오신 곳이 목포예요. ‘산정동’에서 사셨어요. 유달산의 한 굴에서 목포 쪽을 향해 많은 기도를 하셨다고 해요. (목포 교회의 김육수 장로가 그 이야기를 듣고 굴을 찾아 나섰지만, 찾지는 못했다고 한다.) 당시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서울을 오가며 전도하고 다니셨는데 목포역에서 서울역까지 완행열차 기차역을 줄줄 외우셨지요. 원로목사님은 황해도 출신이시지만, 예전에 지역감정 문제가 거론되고 할 때면 “나도 전라도 사람이야”라고 하셨죠.
우리 교회에서의 시간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1978년도였어요. 성결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는데, 누님(안미영 권사)과 매형(송근상 장로)의 권유로 성경공부를 해보고는 굉장한 말씀이라고 느껴졌어요. 처음으로 목요집회에 왔을 때, 그날 원로목사님은 예정됐던 설교 제목과는 달리 갑자기 ‘십자가의 보혈’에 대한 말씀을 하셨어요. 땀 흘려가며 보혈에 관한 진수를 전해주실 때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일찍 선택하셨군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새벽마다 기도하시고 산(山) 기도도 많이 다니셨는데, 특히 치유의 은사가 있으셔서 주변에 많은 분들의 병이 치료되었어요. 1970년대는 성령운동의 시대였지요. 부흥회에서 신앙체험을 하고 주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어요.
성경공부 이후 바로 평강호(號)에 합류하셨나요?
이미 성결교단에서 제가 미국 파송자로 선발되었어요. 박 목사님께 인사차 찾아뵈었을 때 말씀드렸더니, “나랑 같이 일하자” 하시더라고요. 바로 포기했죠.
미국과 미국행이 선망의 대상이던 시절에, 큰 결단이었군요. 이후 교회 생활은 어떠셨나요?
원로목사님 수행하는 게 낙이었어요. 카메라를 좋아하시는 원로목사님과 취미도 같았어요. 귀한 카메라를 선물로 많이 주셨어요(웃음).
수행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그건 그렇죠.(웃음) 예전에 어떤 장로님이 보름 정도 동행했다가 완전히 탈진했던 유명한 일화도 있었지요. 원로목사님은 주무시질 않잖아요? 초기에 노량진 대성교회 근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려고 계약까지 다 끝냈는데, 교회 밑 사택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원로목사님 계시던 방 바로 아래. 연탄을 때던 아주 오래되고 낡은 곳이었죠. (식구들이 연탄가스로 쓰러져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고 했다) 밤 12시고, 새벽 1시고, 퇴근이랄 것도 없었어요. 늦은 밤 어느 순간 잠깐 (원로목사님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 탈영병처럼 도망가곤 했죠.(웃음) 그러고도 새벽 4시 반이면 목욕탕 가자고 깨우셨어요. 어느 날은 졸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는데, 새벽 2시였고 원로목사님 방이었어요. 목사님은 랜턴을 켜고 성경을 보고 계시더라고요. 제 잠에 방해될까 봐 그러신 거죠. 저를 보시더니 “여기서 자고 가” 하셨는데, 뒷걸음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적도 있죠.
대전에 내려간 뒤에도 매주 목요일에 본교회로 예배드리러 왔어요. 그러면 늘 ‘내일 가라, 내일 가라’ 하시고 이튿날에도 ‘내일 가라’ 하셔서 토요일에 온 적도 있어요. 참 사람을 많이 아껴주셨어요. 많은 사랑을 받았고, 늘 재미있게 동행했어요.
1980년대에 우리 교회 주일학교 체계를 확립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본교회에 있을 때 유년주일학교만 담당했어요. 당시 주일학교 선생님들만 200명이었어요. 모두들 노고가 컸어요. 토요일이면 밤 11시까지 남아서 교재를 만들었어요. 원로목사님의 대예배 설교를 쉽게 이해하도록 그림으로 그려서 다음날 어린이 주보로 내놓았지요. 그때도 어린이 관현악단을 만들었구요. 서울 원지동 성화산 수양관을 매입하고 맨 처음 단체 수양회를 한 것도 주일학교였지요. 당시 주일학교가 가장 활성화되기로 유명했던 한 대형교회의 교사 출석률이 90%였는데, 우리는 98%였어요. 당시 열심이었던 교사들 가운데 전도사 되신 분들이 많지요.
대전은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1984년도였지요. 원로목사님이 “대전에 과학자들이 많은데 거길 누군가 가야겠다”면서 “제비뽑기를 하자” 하셨어요. 제비를 뽑기도 전인데, 원로목사님은 “안 목사가 뽑힐 걸?” 그러시는 거예요. 원로목사님을 수행하는 게 낙일 때인지라, 마음속에 ‘제가 왜 뽑혀요?’라는 생각이 스쳤는데, 아! 정말 제가 뽑힌 거예요. 대전에 간 뒤에도 원로목사님 생신이거나 할 때면 음식을 장만해서 찾아뵙곤 했죠. 미국에 3년 6개월 계실 때도 1년에 세 차례는 그렇게 했지요.
대전은 사실상 개척교회였어요. 내려가 보니 서향(西向) 집에 한 칸짜리 방이었어요. 예배드릴 곳도 없었는데, 박대희 장로님이 27평짜리 자신의 사무실 한 켠(9평)을 내주어서 창립예배를 드렸지요. 새벽기도도 다니고 하려면 무엇보다 차가 제일 필요했어요. 서울 올라오는 버스에서 어린 아들에게 “함께 기도하자” 했더니, “차를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한 적도 있었어요. 얼마 안 있어 누님과 매형이 ‘포니2’를 보내주셨지요. 박 장로님은 성도가 늘어나자 나중에는 교회에 18평을 내어주고 자신이 9평을 사용했어요.
안갈렙 목사의 첫 단독 목회지인 대전 성도교회
미국행도 제비뽑기였나요?
명령이었어요. 1990년이었는데 비자가 예상보다 너무 빨리 발급돼서 제대로 정리도 못하고 떠났지요. 짬을 내서 뭘 하려 해도 이런저런 일로 부르셨고, 심지어는 갑자기 “산에 가자” 하셔서 뭘 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사실 7번 교회를 옮겨 다니면서 이삿짐을 싸본 적이 없어요. 갑자기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007 가방에 성경하고 몇 가지 챙겨서 떠나면 아내가 나머지는 다 정리했지요. 한국 들어올 때도 그렇고요. 아내(이숙환 사모)가 고생 많았어요. 그래도 말씀에 ‘아니오’ 해보지 않았던 건, 전적으로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박윤식 목사와 기념촬영한 안갈렙 목사와 이숙환 사모 부부
안 목사는 1980년대 교회 주보를 비롯해 말씀 노트, 카세트 테이프, 각종 행사 사진, 영상 등을 지금껏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살림살이는 내버려도 그건 보관했다”고 했다.
뉴욕에서의 7년 중 절반은 원로목사님을 모실 수 있어 좋았습니다. 1994년 오셔서 3년 6개월간 뉴욕을 본거지로 삼아 머무르시며 선교하셨죠. 3층짜리 개인 집을 교회로 썼는데, 3층 쪽방에서 기거하셨어요. 1층은 교회였고, 2층은 사무실이었어요. 이 기간에는 저도 집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늘 같이 교회에서 생활했지요. 이 기간 한국 성도들에 대한 그리움이 어떠했는지, 지켜보기에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설교 녹음을 하시면서 눈물 흘리신 것을 많이 보았어요. 성도들의 영혼을 걱정하시고,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하셨어요. 개개인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성장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크게 기뻐하셨죠.
그런 아픔 가운데서도 열방이 모여들 때를 대비해서 이 기간 그 터를 닦아 놓으신 것 같아요. 미주뿐 아니라 세계선교는 사실 이때 원로목사님이 일일이 다니시면서 기틀을 잡으신 겁니다. 뉴욕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교회 터전을 찾으시러 미주 전 지역을 왕래하셨고 일본, 동남아까지 다니시면서 선교 영역을 넓혀가신 것을 가까이서 지켜봤죠.
미국만 해도 「노아 복음선교회」를 창립하셔서 전 미주 성도들이 한자리에 다 모여서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하셨죠. 500여 명이 3박 4일 이상 숙식하는 행사가 4차례 치러졌어요. 미국 각처에서 특별 휴가들을 내고 참석하는 열심을 보였고 오직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각 지역 교회들이 피켓 들고 한복 차림으로 입장하는 그때 사진들이 지금도 남아있죠. 그 즈음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성장하고, 미국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와 목회도 이뤄졌죠. 1997년 원로목사님이 귀국하실 때 배웅을 마치고 저도 교회 와서 쓰러져서 1주일 입원했었습니다.(웃음)
뉴욕 이후의 목회는 어떠셨나요?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호세(새너제이) 교회는 가정 수는 적었지만 모두 본교회 출신들이었고, 굉장히 뜨거워서 책망할 것이 없었어요. 1년쯤 있다가 갑자기 캐나다로 가라고 하셔서 급하게 토론토로 가게 됐어요. 처음엔 외국인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렸고요. 워싱턴DC에서도 흑인교회에 세를 내고 있을 때 부임했죠. 한동안 오후 2시 한차례만 예배를 드리다 보니, 몸이 편해지길래 안 되겠다 싶어서 금요 기도모임을 더하고, 수요예배, 새벽예배 이런 식으로 예배와 모임을 늘려나갔죠. 모임과 예배가 교회의 기본입니다.
한국에 다시 귀국하실 때의 기분은 어떠셨나요?
너무나 뜻깊은 일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목포는 원로목사님이 산에서 내려오신 직후 거주하시면서 전도하러 다니신 곳입니다. 당시 목포에서 부흥회도 하셨는데 “남은 자가 되어라. 이곳에 남은 씨알들이 많다”고 하셨다고 해요. 그때 원로목사님을 만났던 성도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지만, 그분들의 자제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당시에 많이 배척 당하시고, 많은 눈물을 흘리셨던 것으로 기억들 하시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말씀에 대한 성도들의 열심히 너무나도 뜨겁습니다. 목포 늘소망교회는 4차례 성경 구속사 세미나를 열면서 서울 본교회는 물론이고, 교회 재정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항상 구속사 세미나만을 위한 헌금을 별도로 했고, 행사 이후 남으면 교회 재정에 넣곤 했지요. 목포는 6·25 때 인민군에 의해 순교한 사람이 대단히 많은 곳입니다. 어린이까지 한 교회가 통째로 수장된 일도 있구요. 도시 전체가 노화되고는 있지만, 신앙에의 열심이 있고, 그런 만큼 교회 수도 많고 기성 교단의 교세도 단단한 편이죠. 그런 가운데서도 구속사 말씀을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2015년부터 「목포 베리트 아카데미」에 40명 정도 나오고 있습니다. 제 건강 문제로 1년 반 정도 쉬었는데도 목사님들끼리 장안산 기도회도 다녀오고 하시더군요. 주 1회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공부해 왔는데, 공부의 시간이 쌓이니 저자의 중요성을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왜 「구속사 시리즈」를 알아야 하고, 봐야 하는지 그분들이 직접 간증하세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영혼이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죠. “책의 사상과 이념은 저자에 있다”고 강조해 온 것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습니다.
목포 늘소망교회
「목포구속사아카데미」는 목포를 중심으로 무안, 영암, 완도, 한평, 강진 등 인근 지역에서 활동 중인 목회자들의 모임이다. 통합, 기장, 예장, 성결, 나사렛, 예성, 중앙 등 참여 교단이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여주 평강제일연수원에서 열린 하계대성회에도 단체로 참석하기도 했다.(참평안 2016년 8월 호)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정리하고 디지털화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구속사 시리즈를 받아들고 보니 평생 들었던 말씀이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더라구요. 초기에 하셨던 말씀들도 지금 구속사 시리즈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런 것들을 연결 짓고 시청각화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책입니다.
해외 선교의 비전은 어떻게 수행돼야 할까요?
워싱턴에 있을 때 구속사 시리즈 제2권 「잊어버렸던 만남」이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었는데, 한 미국인 신학 교수에게 출애굽 이후 광야 노정 지도를 보여주고 설명을 해주었더니 크게 놀라는 거예요. 그래서 ‘책의 저자가 곧 뉴욕으로 올 예정인데, 가서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기꺼이 그러겠노라”해서 만남이 이뤄지고, 원로목사님께 안수를 받았던 일이 있었어요. 미국 사람들도 말씀의 가치를 알고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찾아가 전달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어요. 미국인이 미국인에게 구속사를 가르칠 수 있는 단계에까지 가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찾아가는 선교에 더 매진해야 하는 단계인 것 같아요. 현 단계에서는, 불러다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고 그 수단으로서 미국 신학교의 설립과 인가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이루실 것입니다.
글_목포=이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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